지금이야 민물장어라 불리는 (뱀)장어는 거의 99%가 양식산이지만 낙동강에 하굿둑이 들어서기 전까지인 지난 1980년대 중반까지 '깨끗한' 낙동강변에서는 장어구이가 부산을 대표하는 요리로 유명세를 떨친 적이 있었다. 낙동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 마을의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따라 쭉 늘어선 장어구이집은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뤘다. 이곳의 이름은 북구 금곡동 동원마을이었지만 사람들은 장어구이집이 몰려 있어 '장어마을'이라 불렀다. 워낙 유명세를 타다 보니 마을 입구에는 멀쩡한 마을 이름 대신 아예 '금곡 장어마을'이라 음각된 어른 키보다 큰 입석이 있었다. 부산시가 '부산의 7진미'로 선정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선시대에는 낙동강 뱃길을 쉬어가는 나루터로, 수참이 설치되기도 했던 동원마을은 현재 사라지고 없다. 2000년대 초반 지금의 이안금곡아파트의 공사가 시작되면서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당시의 장어구이집 몇몇은 장어마을 인근에서 여전히 그 명맥을 유지하며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장어마을을 아시나요
3대째 옛맛을 고수하고 있는 북구 금곡동 웅천집의 양념장어구이. |
지난 1980년대 중반까지 낙동강변의 금곡동은 사방이 논밭이었다. 부산이 도시화와 산업화가 한창 전개될 때에도 이곳 사람들은 아침밥을 든든히 챙겨 먹고 생업을 위해 각자 논으로 강으로 일을 나갔다.
금곡동에는 예부터 동원·공창·화정·율리 등 자연부락이 넷 있었다. 현재 낙동강을 따라 달리는 부산지하철 2호선 역 이름이 '수정-화명-율리-동원-금곡-호포'순인 것도 이러한 자연부락 이름을 차용한 것이다.
낙동강변 금곡동 네 개의 자연부락 중 왜 동원마을만 장어마을로 불렀을까. 장어마을에서 '은행나무집'을 30년간 운영한 어경우(73) 씨는 "특별한 이유는 없고 단지 강과 가장 가까이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며 나머지 세 개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농사를 지었다"고 말했다. 젊은 시절 낙동강에서 장어를 직접 잡기도 한 그는 "동원마을 사람들이 장어를 잡으며 재미를 좀 보자 아마 1970년대 중반 이후에 공창과 화정마을 사람 몇몇이 뒤늦게 장어잡이에 뛰어들었다"고 덧붙였다.
어 씨는 "강에서 잡아 바로 식당에서 요리했으니 얼마나 싱싱하고 맛이 있었겠냐"며 "당시 돈깨나 있는 부잣집 사람들이나 부산지역 정·재계 유명 인사들이 먼지 폴폴 날리는 비포장길도 마다하지 않고 와 먹고 갔다"고 전했다.
장어마을의 장어구이집은 한때 16곳까지 늘어나는 등 성업을 했지만 1987년 낙동강 하굿둑이 들어서고 1991년 지하철 공사가 시작되면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덕천교차로에서 장어마을까지 차로 1시간은 기본이고 어떤 땐 2시간도 걸리다 보니 손님이 찾겠어요. 이후 IMF 구제금융 한파 등으로 경기가 침체되면서 더욱 위축받아 6곳 정도만 남고 거의 문을 닫았지요."
그러다 이곳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옛 영화를 뒤로한 채 눈물을 머금고 자리를 내줘야 했다. 이런 와중에 아쉽게도 동원마을 입구에 서 있던 '금곡 장어마을'이라 적힌 입석도 행방불명이 돼 버렸다.
■옛맛을 그대로 지켜요
웅천집에서 바라본 낙동강과 김해 대동면 일대. |
웅천집(051-332-8740)에 들어서면 김해 동신어산과 백두산 등을 병풍 삼아 1300리를 내달려온 낙동강의 물줄기가 한눈에 보이고, 그 뒤로 김해 대동면의 비닐하우스가 햇빛에 반사돼 반짝거린다.
웅천집은 김도균(44) 대표와 그의 누나 명숙(58) 씨가 2년 전 작고한 모친에게 장어요리 비법을 전수받아 옛맛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은행나무집'을 운영했던 어 씨는 "나의 누나이자 김 대표의 모친이 어머니로부터 비법을 배워 이제 조카인 명숙이가 장어요리를 하고 있으니 3대째 대물림을 하고 있는 셈"이라며 "잠시 손가락을 꼽아보더니 올해로 54년쯤 됐겠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손님의 70% 정도가 20~30년 된 단골"이라며 "어릴 때 제가 '아저씨'라고 부르던 분들이 백발이 성한 지금도 찾고 있으며 일하는 아줌마 세 명 모두 20~30년 돼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이라고 말했다.
웅천집의 양념장어 구이는 옛날 방식 그대로다. 뼈와 머리를 추려내 푹 고운 육수를 식사전에 한 그릇 올린다. 양념장은 이 육수에 조선된장과 간장 고추장 고춧가루 물엿 마늘 생강 매실액기스를 넣고 만든다. 장어는 초벌구이를 하며 기름을 빼면서 미리 만든 양념장을 세 번 이상 발라 이 집 특유의 맛을 낸다.
태우지 않으면서 먹기 좋게 알맞게 구운 장어는 부드러우면서도 독특한 향이 살아 있다. 30년 전 직장을 다니다 어머니에게 장어구이법을 배운 명숙 씨는 "석쇠 한 판 단위로 구워내는 다른 집과 달리 한 모타리씩 일일이 굽고 또 구워 양념을 하나하나 골고루 바르기 때문에 비록 늦게 나오지만 맛은 아마도 최고일 것"이라고 자부했다. 장인 정신의 진솔한 손맛이 밴 완결판인 셈이다. 다른 집과 달리 양은 약간 줄었지만 20년째 1인분에 1만5000원을 고수하는 고집도 모두 자부심에서 나온 것이다.
웅천집에서는 예전처럼 장어 이외에 향어회와 향어매운탕 그리고 메기매운탕도 맛볼 수 있다. 하나같이 일품이다. 향어 및 메기매운탕만을 위해 찾는 사람도 꽤 있다.
# 1970년대 낙동강은
- 큰 가오리도 잡히고 장어 하루 5관씩 잡던 풍요로운 생명의 강
낙동강에서 직접 장어도 잡고, 북구 금곡동 장어마을에서 '은행나무집'을 30년간 운영한 어경우(73·사진) 씨는 "하굿둑이 조성되기 전 낙동강은 장어를 비롯해 잉어 숭어 도다리 웅어 등과 조개 등이 잡히는 그야말로 풍요로운 생명의 강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2관(1관은 3.75㎏)이나 되는 아주 큰 가오리가 잡힐 정도로 수산 자원이 풍부했다"고 덧붙였다.
장어는 주로 긴 낚시줄에 여러 개의 낚시를 달아 물속으로 늘어뜨리는 주낙(연승)으로 잡았다. 미끼는 직접 잡은 지렁이나 갯지렁이를 사용했다. 장어는 강 바닥에 주로 살아 물가에서 가까운 지점은 수심 5, 6m 정도였고, 깊은 곳은 20m나 되는 지점도 있었다.
어 씨는 "장어를 주로 잡던 어부들은 하루에 5관 정도를 잡았지만 특히 많이 잡힐 땐 하루에 10관까지 잡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 정도면 괜찮은 밥벌이였다고 한다.
주낙어업의 경우 보통 저녁 무렵 낚시를 던져놓고 다음날 아침 일찍 전날 표시해둔 지점으로 가 낚시줄을 당겨 장어를 건졌다. 비가 특히 많이 오거나 홍수에 버금가는 수위에 이르면 하루에 두 번 정도 낚시를 내려 장어를 건지기도 했다.
금곡동 동원마을, 다시 말해 장어마을에선 20명 정도가 농사 대신 장어를 잡았다. 이들은 구포어촌계에 소속됐다. 이보다 북쪽인 물금이나 남쪽인 구포 쪽에서도 당시 장어를 잡았다.
장어의 주 어획기는 봄부터 가을까지였지만 장어를 잡지 않을 땐 다른 어구를 이용해 잉어나 웅어 등을 잡았다. 특히 봄에는 숭어를 잡으러 가덕도까지 원정을 떠나기도. 낙동강이 꽁꽁 어는 겨울에는 기차를 타고 원동역에서 내려 물금 원동 쪽 낙동강에서 얼음낚시를 했다. 잉어가 이곳에서 특히 잘 잡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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